2024.07.01 | 조회 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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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서, 마지막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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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탄생에 대해 그 어떤 선택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대, 시각, 장소, 가족과 성별 어느 것 하나 고를 수 없었지요.
그때의 내가 무얼 할 수 있었겠어요?
나는 태어난 줄도 몰랐단 말입니다!

탄생의 순간은 잊었으나
아마도 첫 숨을 들이쉬었을 거예요.
그건 희극이자 비극의 시작이었고, 리허설도 없이 무대에 서야만 했습니다.
그 뒤로는 멈출 수 없는 공연이 시작되었지요.
때로는 아무도 지켜봐 주지 않는 무대 위에서 춤을 추어야 했어요.
때로는 발이 아팠지만 다른 연기자와 호흡을 맞추기 위해 꾹 참아야 했지요.
그리고 때로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우스꽝스러운 모양으로 넘어지기도 했어요.

그렇게 극은 계속 진행되었지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몸에 힘이 빠질 즈음 공연이 끝나감을 느낍니다.
익숙한 관객들은 하나둘 사라지고,
남은 이들의 얼굴에도 전에 없던 주름이 늘었군요!
이제는 알아요, 내가 퇴장할 때라는 걸.

탄생은 마음대로가 아니었으니 끝은 내가 골랐으면 해요.
무릎까지 오는 풀들이 파도처럼 출렁이는 들판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저 멀리 새들이 둥지 튼 바위산이 보여도 좋겠어요.
조금 더 욕심을 부리자면 이른 아침이었으면 좋겠군요.
나는 아침에 태어났으니 그때 떠나고 싶어요.
적란운 사이로 내리는 햇빛을 들으며
들판을 쓰다듬는 바람 소리를 보다가
내가 온 곳으로 조용히 돌아가고 싶어요.

다시, 유기물에서 무기물로.
그러니까 나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는 거예요.
본질과 더 가까워지는 거지요.
긴 이야기를 품은 채, 언젠가 다시 살은 이의 호흡이 되기를
기다릴 거예요.

어차피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면
살아가는 동안 더 많이 주며 지내도 좋겠습니다.
가진 것은 사라지지만
주는 기쁨은 사라지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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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퍼펜션 (63eoths)
"지구는 생명체들이 묵고 있는 거대한 펜션이다." 하이퍼펜션은 유한하고 아름다운 지구의 투숙객들에 대한 이야기와 이미지를 만듭니다. 앞으로도 대자연과 생명의 경이, 삶의 환희와 무용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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